‘조커’와 ‘조커 : 폴리 아 되’
이제 하나의 장르로 봐야할 것이다. 히어로물이라는 것에 대하여. 단순히 영웅이 등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영웅이 직접 서사를 이끌고 그 영웅이 없다면 영화 완성이 되지 않을 히어로물, 이제는 어엿한 하나의 장르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허나 히어로물에 영웅만 있다고 하여 완성되는가? 아니다. 주인공 영웅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 서있는 악당 혹은 빌런이 존재해야 한다. 영웅에 맞선 악당의 존재, 이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히어로물에 필수적 요소다.
세계 영화사를 관통하는 가장 유명한 히어로물 주인공을 뽑으라면 누가 있을까? 현대시점에 들어서야 어벤져스라는 영웅집단이 부각돼 답이 갈릴 수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전통적 히어로는 슈퍼맨 혹은 배트맨이다. 둘 중에서도 배트맨은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스핀오프물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재다.
그럼 이러한 질문들이 완성될 수 있겠다. 배트맨이 재창작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배트맨에 맞서 가장 강력한 악당은 누구인가? 그 악당의 존재감은 배트맨의 존재감에 비견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답을 해보자면, 배트맨에 반대편에 서서 배트맨에 버금가는 존재감으로 배트맨 시리즈가 재창작될 수 있게 힘을 부여하는 그는 바로 조커다.
실사영화에 한하여 조커를 연기한 배우 계보는 다음과 같다. 1966년 개봉된 ‘배트맨’에서는 시저 로메로, 1989년 소위 ‘모던 에이지 시리즈’라고 불리는 ‘배트맨’에서는 잭 니콜슨, 2008년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다크 나이트’에서는 히스 레저, 2016년부터 DC 확장 유니버스 실사영화에서는 자레드 레토가 조커의 명맥을 이었다.
그리고 2019년 다섯 번 째 조커가 등장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것도 맞은편에 배트맨의 모습조차도 없이. 그 다섯 번 째 조커는 앞서 말한 히어로물의 도구적 존재로서의 악당의 의의를 모두 거부한 채 독자적인 존재로 세상에 조커의 재탄생을 알렸다. 과연 그는 누구이고 그의 이야기는 어떠했을까.
2024년 다시 그 때를 떠올려 봐도 충격이었다. 이제는 다시 없을 것만 같았다. 앞선 조커들을 뛰어넘는 아니 버금가기만 해도 엄지손가락을 올려줄만한 새로운 조커의 존재가 등장할 수나 있을까? 사실 시저 로메로가 연기한 최초의 조커부터 잭 니콜슨, 히스 레저까지 조커의 위상은 계속해서 상승했다. 잭 니콜슨 시점에서도 잭 니콜슨 이상의 조커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후 배트맨의 재해석을 맡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다크 나이트’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세기의 미친 놈’ 히스 레저표 조커를 만들어냈다. 물론 히스 레저가 조커이고 조커가 히스 레저라고 느껴질 정도의 경이로운 연기가 없었다면 그 창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조커의 위상은 갈수록 올라만 갔다. 하지만 이후 자레드 레토가 그린 조커는 기대에 미치지 못 했고 그대로 조커라는 희대의 악당은 그렇게 수면 아래로 사장(死藏)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조커는 다시 태어났다. 그 때가 2019년이었다. ‘마스터’, ‘그녀’ 등의 작품으로 다양한 연기색을 펼쳐온 와킨 피닉스가 조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앞선 조커들과 너무나도 다른 조건이었다. 2019년 세상에 나온 영화 ‘조커’는 영웅과 악당이 맞서는 구도도 아니었다. 그저 맨 얼굴의 아서 플렉, 화장을 한 얼굴의 조커라는 인물 그 자체가 홀로 이끌어가는 영화였다. 히어로물이 아닌 곳에서의 조커라니, 거기다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배우였던 와킨 피닉스가 맡다니. 개봉 전부터 2019년의 전운은 놀라움으로 차있었다.
공개 후 역시 충격적이었다. 영화 ‘조커’ 안에서의 아서 플렉은 그야말로 망상에 사로잡은 미친 자였다. 자신의 객관적 능력을 감지하지 못 하면서도 내면의 망상은 계속해서 키워내며 세상에 대한 파괴를 준비를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조커의 페인팅을 완성시키고 폭발시키는 그 전율은 영화 속 군중들만이 아닌 영화 ‘조커’를 관람하는 2019년의 대중들도 따르고 싶게 만들 정도로 매력의 강도가 상당했다. 영화 개봉 후 대중들이 조커를 따라 유사범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가 대두될 정도로 2019년의 영화 ‘조커’가 가져다 준 충격은 5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할 정도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배트맨의 악당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조커를 한 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있을 줄 알았다.
있을 줄 알았다. 이 표현을 쓴 이유는 간단하다. 속았기 때문이다. 2024년, 영화 ‘조커’의 후속작으로 개봉된 ‘조커 : 폴리 아 되’라는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대중들을 속였다. 먼저 속인 것은 와킨 피닉스가 전작에서 혼신의 힘으로 연기한 아서 플렉은 조커가 아니었다.
‘조커 : 폴리 아 되’ 안에서 아서 플렉은 간간히 고유의 얼굴 화장을 하고 재판장에 들어선다. 자신을 변론할 때 느껴지는 강렬함과 힘은 영락없는 우리가 그리고 있는 조커였다. 하지만 결국 조커가 아니었다. 왜? 아서 플렉은 전작에서 저지른 살인 및 범죄에 속죄했기 때문이다. 속죄하는 조커? 이는 성립될 수 없다. 이는 조커가 아니다. 다시 말해 영화 ‘조커’와 영화 ‘조커 : 폴리 아 되’에서 등장하는 아서 플렉은 자신 이후 어디서든 태어났을 진짜 조커의 광기에 동기부여를 해줬을 뿐이다. 그 진짜 조커는 아서 플렉이 얼굴 화장을 하고 저지른 광기에 동화돼 자신도 그 광기를 발현할 것이면서도 아서 플렉의 최후 반성에 실망하여 자신이 진짜 조커가 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아서 플렉은 그저 진짜 조커 탄생의 단지 디딤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허무한 결론이다. 이 서사의 열고 닫음에 동의가 되면서도 결국 따르는 감정은 ‘속았다’였다. 어찌됐든 영화적으로 한 인간의 서사를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조커 : 폴리 아 되’라는 영화를 동의해야 하는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저 희대의 악당 조커를 그저 차용한 것 같다는 어이없음에 반대해야 하는지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다.
조커는 사실 조커가 아니었다는 속임수에 이어 또 한 가지 대중들이 속은 것이 있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1차적으로 분류될 장르가 뮤지컬이라는 것에 대중들은 두 번 째로 속았다.
전작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후속작 제작 소식에 대중들은 환호를 질렀다. 다시 한 번 영화 ‘조커’가 내뿜은 강렬함을 다시 느껴볼 수 있겠구나.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박살났다. 이렇게 낭만 흥건한 조커라니. 그 조커 옆에 할리 퀸이라니. 아서 플렉이 홀로 쌓은 조커의 강렬함을 할리 퀸으로 부르기도 부족한 리 퀸젤과 함께 계속해서 낭만을 나누며 뮤지컬의 방법으로 직접 부수다니. ‘조커 : 폴리 아 되’을 보는 내내 뮤지컬 넘버가 흐를 때마다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우리는 이 걸 보러 온 것이 아닌데’라는 내면의 속삭임이 계속 일었다.
뮤지컬 넘서 사이사이에 얼굴 화장을 하고 조커의 힘을 뿜은 순간, 10번 째 뮤지컬 넘어 ‘Joker’를 와킨 피닉스가 열창하는 순간만큼은 전작의 강렬함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전율이 잠깐 돌았다. 하지만 그는 오래 가지 않았다. 다시 아서 플렉과 리 퀸젤은 사랑을 속삭이며 노래했으며 아서 플렉은 결국 참회하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즉, ‘조커 : 폴리 아 되’의 뮤지컬 장르 선택은 철저히 실패한 것이다.
여하튼, 아서 플렉은 참회했고 조커가 아닌 것이 드러났다. 더 이상 이어질 서사도 없다. 차라리 이렇게 끝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속편을 다시 제작한다는 정신나간 판단이 이뤄진다면 세계적 비난에 제작진은 맞이할 것이다. ‘조커’와 ‘조커 : 폴리 아 되’, 이처럼 대비되는 전작과 후속작도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