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프로레슬링 업계에 있어 WWE가 부동의 1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물론 가장 먼저 압도적인 자본력을 제1의 요소라 꼽을 수 있겠지만 뒤 따르는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WWE만의 독특한 경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경기이자 행사이자 사건인 것이 바로 로얄럼블이다.
로얄럼블의 기본적인 룰은 다음과 같다. 2025년 기준 30명의 선수들이 일정 간격의 시간을 두고 차례로 등장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경기다. 3단 로프 위로 넘겨져 링 밖의 바닥에 두 발이 닿으면 그 선수는 탈락이다. 30명의 선수들을 한꺼번에 등장한다는 점, 카운트다운을 세면서 등장하기에 어느 선수가 깜짝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점, 1년의 한 번 씩 개최된다는 점에서 단 번에 프로레슬링팬들의 시선을 집중 시킬 수 있어서 로얄럼블은 이제 WWE를 넘어 프로레슬링 업계게 있어 아주 중요한 개념이 됐다.
각본상으로 로얄럼블이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우승자의 특권이 바로 레슬매니아에서 챔피언에게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로얄럼블에서 우승한 것도 세계의 집중을 받는데 레슬매니아에서 공식적으로 챔피언에게 도전을 할 수 있다니. 각본 밖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시대의 아이콘 새로이 탄생시킬 수 있는 너무 매력적인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얄럼블은 레슬매니아와 필수적으로 귀결돼있고 WWE는 새해부터 4월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이 점에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도 부족하지 않은 로얄럼블의 중요성, 왠지 서서히 그 강조가 옅어지는 듯 하다. 로얄럼블의 위상이 예전만 못 하다는 평가가 슬슬 피어오르고 있다. 두 번의 로얄럼블 역사에서 느껴졌다. 2012년과 2025년에서.
돌이켜보면 급작스러운 것은 맞다. 정체성과 매력점이 파악되기도 전에 1선급 타이틀 전선에 이름을 올리며 RAW에 콜업된 지 1년도 채 안 돼 WWE 챔피언에 오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셰이머스다.
겨우 비교할 선수가 있다면 브록 레스너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브록 레스너는 데뷔 때부터 압도적인 포스를 선보이며 어느 누구라도 확신은 가졌다. ‘아, 저 선수가 바로 다음 세대 챔피언이 되겠구나’라는 확신. 그러나 셰이머스에겐 없엇다. 그런 확신이. 그래서 아직까지도 셰이머스의 데뷔 직 후 갑작스러운 푸쉬 및 WWE 챔피언 등극은 논란의 소재다.
이런 셰이머스에게 로얄럼블 우승쯤이야 오래 걸릴 일이 있겠는가? 푸쉬 정도를 생각하면 오래 걸렸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2012년 로얄럼블을 셰이머스는 우승하며 레슬매니아 티켓을 따냈다. 결과론적인 얘기겠지만 2012년 로얄럼블 참가 로스터 자체가 다른 년도에 비해 부실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1선급 라인에서 활동하면 셰이머스를 우승 후보로 경기가 전개될수록 예상했을 뿐이지 처음부터 그의 우승을 예상하고 바랬던 이는 많지 않았다. 셰이머스기 때문에 언젠가 로얄럼블을 우승할 거라고 예상했기에 차라리 지금 우승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자조 섞인 평가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무리 논란의 평가가 있는 셰이머스라도 셰이머스는 당해 로얄럼블 우승자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왜? 팬들도 WWE도 집중하는 지점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레슬매니아 28의 메인 이벤트는 드웨인 ‘더 락’ 존슨과 존 시나의 대결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얄럼블 우승자 셰이머스의 레슬매니아 28의 경기는? 레슬매니아 28 맨 앞 경기, 즉 오프닝 경기로 배치가 됐다. 레슬매니아 28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다니엘 브라이언과 셰이머스의 경기가 오프닝 매치?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가 돼버린 선택이었다. 로얄럼블 우승,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다니엘 브라이언 그리고 셰이머스까지 연관돼있는 모든 개념과 인물들에게 마이너스 밖에 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에 더 최악으로 남게 한 18초라는 경기 시간. 다니엘 브라이언은 파트너 AJ 리와 키스를 나눈 후 뒤를 돌아보자마자 셰이머스에게 브로그 킥을 허용했고 그래도 핀폴을 내줘 패배와 동시 챔피언 교체까지 내줬다. 이게 뭔가 대체, 로얄럼블의 위상은 어디에 있고 레슬매니아의 위상은 또 얼마나 깎아버린 것인가. 최소한 2012년에 있어서 ‘로얄럼블’ 네 글자는 WWE가 직접 지워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로얄럼블 우승자의 역사에 있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존 시나가 다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바티스타가 다시 우승을 차지했을 땐 어마어마한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나카무라 신스케가 우승했을 땐 동양인 우승이란 획기적인 선택을 감행해 놀라움을 일으키기도 했다. 2023년과 2024년에는 연달아 코디 로즈가 우승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기도 했다. 그래도 로얄럼블의 의미는 여러 결과로 유지되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2025년 새해가 밝았고 2025년에도 로얄럼블은 개최됐다. 2025년 로얄럼블은 나름의 기대치가 있었다. 2024년 존 시나는 내년 레슬매니아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고 일찌감치 로얄럼블 참전 역시 선언했다. 그리고 뒤 따라 로만 레인즈, 세스 롤린스, 드류 맥킨타이어, 레이 미스테리오, 나카무라 신스케 등 우승자 출신만 6명에 그 뒤를 바치는 풍부한 로스터가 있었다.
그런데 우승은 제이 우소에게 돌아갔다. 제이 우소? WWE는 그럼 이제 제이 우소를 단순히 태그팀 전선급에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닌 1선급 싱글 레슬러로 키우겠다는 것인가? 로얄럼블 2025를 우승한 제이 우소다. 이제 레슬매니아에서 제이 우소는 월드 챔피언십에 도전할 것이다. 강력한 기시감이 든다. 2012년 때와 같은. 현재 WWE에는 올해 레슬매니아에 출전할 것으로 강력히 예상되는 선수들과 대립이 있다. 존 시나의 은퇴식을 일단 치러야 할 것이며 새 시대의 아이콘인 코디 로즈의 위상에 걸맞은 상대를 찾아야 한다.(그 상대가 제이 우소가 될 수 있지만 과연 WWE가 매칭할까?) 그리고 로얄럼블 과정에서 로만 레인즈, CM 펑크, 세스 롤린스가 갈등의 전조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굵직한 과제들이 있는데도 굳이 이제 태그팀 전선에서 싱글전선으로 옮겨온 제이 우소에게 레슬매니아를 맡길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2012년의 전철을 밟을까? 또 한 번의 로얄럼블 우승자의 레슬매니아 오프닝 매치가 펼쳐질까? 1분이 채 안 되는 경기시간으로 구성될까? 로얄럼블의 위상한 다시 한 번 처참히 무너지게 될까? 억지로 우승자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로얄럼블로 기억되진 않을까? 어떠한 예감에도 싱글 레슬러로서 서사와 성과 없는 우승자 제이 우소란 결과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