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E에는 1년 PLE 사업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5개의 PLE가 있다. 물론 3월 말 4월 초에 개최되는 레슬매니아가 모든 PLE 중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다. 단순 WWE만의 행사가 아닌 세계 프로레슬링 팬들이 기다리는 축제니 말이다. 그 레슬매니아를 받치는 4개의 PLE가 더 있는데 로얄럼블, 머니 인 더 뱅크, 섬머슬램 그리고 서바이버 시리즈다.
특히나 서바이버 시리즈는 레슬매니아 다음 꾸준히 개최되고 오래된 PLE로 시기도 보통 11월에 개최되기 때문에 레슬매니아로 향하는 대략적 그림을 예상해볼 수 있는 역할도 한다. 그래도 서바이버 시리즈가 더욱 주목 받는 이유는 이름부터가 ‘서바이버’ 시리즈기 때문 아닐까?
한 명의 선수가 끝까지 살아남는 ‘서바이버’ 형식의 기본적 틀을 가진 메인 경기가 항상 서바이버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 했다. 개인적으로 여러 서바이버 형식의 경기 룰 등이 있겠지만 그래도 서바이버 시리즈라는 PLE를 상징하는 경기는 5:5 매치인 듯 싶다.
무려 10명이나 참여하는 5:5 경기. 긴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다. 자칫하면 지루한 서사를 가질 수도 있다. 중간중간 무의미한 움직임들이 이어져 집중도를 흐트릴 수 있다. 이런 우려사항들이 있음에도 세계 프로레슬링 팬들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 WWE 서바이버 시리즈 5:5 경기가 둘 있다. 그 두 경기는 2001년과 2014년에 각각 치러졌다.
2001년 하반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1년의 WWE는 사실상 WWE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애티튜드 시대를 종결하고 새로운 각본과 흐름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는 사건이 하나 발생하는데, 2001년 3월 26일 같은 날 치러진 WWE의 RAW와 WCW의 마지막 나이트로가 동시 생중계로 송출돼버린 것. 이는 레슬매니아 17을 앞둔 빈스 맥마흔과 셰인 맥마흔 간의 대립 과정에서 펼쳐진 연출이었는데, 이 때는 사실상 WCW가 WWE로 매각되기로 확정된 상황이었다.
레슬매니아 17에서 빈스 맥마흔과 셰인 맥마흔이 대결을 치르고 난 뒤 6월부터 본격적으로 WCW와 ECW 연합군(이하 얼라이언스)이 WWE를 침공한다는 소위 ‘인베이전’ 각본이 시작된다. 구도만 본다면 꿈의 각본이었다. 북미 프로레슬링계를 호령하던 단체들이 직접 맞붙는다? 어찌보면 정말 꿈의 각본이 맞았다.
하지만 내실은 그리 탄탄치 못 했다. WCW의 진정한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스팅이나 골드버그가 참여하지 않았고 핵심 악역이었던 스캇 스타이너나 제프 제럿도 없었다. WCW의 1선급 얼굴이라곤 부커 T 뿐이었다. 부커 T 이외에는 WWE에서 활동 중이었으나 과거 WCW나 ECW 경력이 있는 선수들을 전향시켜 각본에 참여하는, 진정한 단체 간의 대결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인적 구성으로 흘러갔다.
그럼에도 인베이전 각본은 7월부터 11월 서바이버 시리즈까지 흘러갔다. 주를 이룬 대결구도는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이하 스톤 콜드)와 커트 앵글의 대립, ‘더 락’ 드웨인 존슨(이하 더 락)와 부커 T의 대립 등이었고 이외에는 나머지 단체 소속 선수들 간의 대결이었다. 그렇게 4개월이 흐르고 11월 19일 서바이버 시리즈 2001이 개최되기에 이른다.
서바이버 시리즈 2001의 메인으로 배정된 5:5 경기에는 WWE 측의 빅 쇼, 케인, 언더테이커, 크리스 제리코, 더 락이 참가했다. 얼라이언스 측에선 셰인 맥마흔, 부커 T, 랍 밴 댐, 커트 앵글, 스톤 콜드가 참가했다. 결과적으로 경기의 질만 따지면 상당한 수준이었다. 지루할 세가 없는 단편 스포츠 영화를 보는 듯 했다. 그냥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스포츠 영화 수준이었다. 당연히 선수들의 고유 기술 및 경기력은 빛이 났다. 이에 더해, 지속적으로 더 락과 작은 갈등을 빚어온 크리스 제리코의 결정적 배신, 후에 밝혀진 바로는 빈스 맥마흔이 의도적으로 심은 이중 스파이였던 커트 앵글의 얼라이언스를 향한 재배신까지. 적절한 프로레슬링만의 배신 그리고 배신이 배치돼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고 단체와 단체가 모든 것을 걸고 싸웠다는 ‘위너 테이크 올’이라는 마지막 서사까지 방점을 찍게 돼 강렬했다는 인베이전 각본이라는 성과와 서바이버 시리즈에 필히 꼽힐 5:5 매치까지 만들어졌다. 수많은 5;5 매치 중에 유난히 기억 남는 2001년의 기억, 이것이야 말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낭중지추가 아니겠는가.
2001년에 이은 또 한 번의 낭중지추, 2014년으로 가보자. 프로레슬링에서 스테이블이란 존재는 어쩌면 필수적이다. 몇몇의 선수들이 공통적인 색깔을 지니면서도 그 안에서 각기 고유의 색깔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 과정은 선수가 성장하면서 꽃 피우는데 효과적이며, 또 다른 면에선 각본을 중추적으로 진행하기에도 효과적이다. 어렵게 개인 선수 단위가 아닌 그 스테이블을 중심으로 각본을 만들어 내가면 되니까.
그리하여 프로레슬링 역사에는 중요한 스테이블들이 많았다. nWo, DX, 에볼루션, 더 실드 등의 스테이블들은 필히 프로레슬링 역사에 언급되고 한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중추적으로 WWE를 이끌었던 스테이블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더 어소리티’다. DX와 에볼루션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인공 트리플 H가 역시 ‘더 어소리티’(이하 어소리티) 중심에 있었다.
악역 스테이블답게 어소리티는 적절한 권력을 ‘나쁘게’ 써가며 세를 불려갔다. 특히나 더 실드를 분해하면서 영입한 세스 롤린스는 더욱 어소리티를 누구도 견제할 수 없게 각본상 성장하게 했으며 더더욱 WWE의 각본을 흥미롭게 이끌었다. 하지만 어느 스테이블이라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절대 선의 남자 존 시나가 직접 어소리티의 대항마로 반대편에 섰다.
이래서 서바이버 시리즈는 유용한 것이다. 어소리티 각본의 정점에 서바이버 시리즈 2014가 다가왔고 선역 군단의 존 시나와 어소리티의 얼굴이 된 세스 롤린스가 각기 지지 선수들을 이끌고 서바이버 시리즈 2014 메인 5:5경기에서 만났다.
2001년 때와 마찬가지로 경기의 밀도는 대단했다. 지루할 틈이 없는 구성이었다. 물론 배신도 있었다. 그 배신의 주인공이 빅 쇼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이번 5:5 경기가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에는 두 가지 면에서다. 하나는 당연히 선역팀 승리의 주인공이 존 시나가 아니었다는 것. 존 시가 주장으로 있음에 당연히 피날레를 존 시나가 장식하는 것으로 대부분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었다. 앞서 말한 빅쇼의 배신으로 존 시나가 아웃됐던 것이다. 승리는 선역팀이라고 하면 과연 마지막을 누가 장식했는가? 그 주인공은 돌프 지글러였다. 그렇다면 돌프 지글러가 직접 경기를 마무리 지었는가? 물론 돌프 지글러의 근성이 이 날 5:5 경기를 상당한 수준으로 올려놓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직접 마무리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직접 마무리를 지은 것은 다름 아닌 외부인물이자 드디어 WWE에 첫 발을 내딛은 프로레슬링계의 전설 스팅이었다. 안티 WWE의 대표격으로 활동했고 WCW의 심장 그 자체로 존재해왔던 스팅이 직접 마지막에 등장해 트리플 H에게 스콜피온 데스 드랍을 선사했고 돌프 지글러가 세스 롤린스를 직접 핀폴 할 수 있게 도와줘 선역팀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게끔 결말을 맺었다. 프로레슬링이라는 세계에서 깜짝 복귀나 깜짝 데뷔는 각본 효과 증폭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다. 그 폭발의 좋은 예가 서바이버 시이즈 2014에 제대로 발현된 것이다. 그것도 전설 스팅의 등장으로.
기본적으로 잘 만들어진 5:5 매치의 경기 구성, 예상 외 돌프 지글러의 선전, 전설 스팅의 등장으로 서바이버 시리즈 2014 역시 13년 전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심는데 성공했다. 일단 스팅의 WWE 첫 등장으로 서바이버 시리즈 2014는 영원히 회자될 수 밖에 없는 PLE가 될 것이다.